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97년 외환 위기 (문단 편집) == 여담 == * 1970년대 [[석유 파동]] 당시와 마찬가지로 대통령 이하 주요 국무위원들이 외환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1997~1998년 국내외를 돌아다니며 '''영업활동'''에 나섰다. 1970년대 석유 파동 당시 미국을 방문해 달러화 지원을 요청했던 [[김종필]] 국무총리는 사태 수습에 한창이었던 1998년에 다시 국무총리를 맡아 [[김용환(1932)|김용환]]과 함께 경제를 조율할 관료들을 대통령에게 추천하는 역할을 맡았다. '저승사자'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가 이 시기에 구원투수로 등판, 30대 기업의 구조조정을 강하게 밀어붙여 1996년 말 기준 평균 387%의 부채율을 평균 200% 이하로 줄이고 은행의 자기자본비율(BIS)을 8% 이상으로 강제해 재무구조를 강화하는 데 성공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해외 순방 때마다 투자유치 활동을 겸하여 한동안 [[홈플러스]]의 모기업였던 [[테스코]] 사가 이 무렵 한국 투자를 결정하기도 하였다. 지일(知日) 인사로 유명한 [[박태준]]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총재는[* 김종필의 뒤를 이어 국무총리가 된다.] [[포항제철]] 활동 당시 구축한 일본 인맥을 활용해 ''''단기차관→중장기로 전환''''하는 협상을 벌여 성사시키기도 하였다. 하지만 얼마 후 일본 측에서 약속을 틀어 버려 외교 문제로 비화될 뻔한 사건이 있었다. 미국의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이 대한민국과의 주요 협상을 앞두고 일본 측에 압력을 넣었다거나 일본 측 관계자가 "우리도 살아야 하니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는 부연설명까지 포함된 루머가 시중에 돌았지만 아직까지 확인된 사실은 없다. 문제의 차관 전환은 1999년에 다시 논의되어 성사되었다. * 한국은행은 1997년 3월 26일 외환위기 도래 가능성을 '''예고'''하고 청와대와 재정경제원에 국제통화기금(IMF)을 비롯한 국제금융기구로부터 외화를 긴급차입하는 등 비상대책을 강구할 것을 건의한 건뿐만 아니라 대통령 비서실이 김영삼 대통령이 외환위기를 인지했다고 밝힌 지난해 11월 중순 전까지 모두 '''23차례'''나 청와대 총리실 재경원에 심각한 외환사정을 보고하고 대책을 건의한 것으로 감사원의 기초조사를 통해 드러났다.[[http://news.donga.com/3/all/19980126/7317782/1|#]] * 부동산 가격이 유일하게 두자리대의 하락세를 보였던 것도 이 시기였다.[[https://www.korea.kr/special/policyFocusView.do?newsId=148616753&pkgId=49500196|#]][[https://imnews.imbc.com/replay/1998/nwdesk/article/1976580_30723.html|#2]] '''1998년 한해에만 집값이 -12.4%나 폭락'''했으며, 당시 국민의 정부는 폭락한 국내 부동산시장을 떠받치기 위해서 대대적인 건설경기 부양책은 물론 외국자본의 국내 부동산 매수를 크게 허용해 주었고 재외동포 등 비거주 한인이 국내 부동산을 살 때 제한을 풀고 “고국의 부동산을 사라”며 홍보하기도 했다. 그리고 현금 많은 부유층의 미분양 아파트 매수를 권장해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 한시 면제 등 혜택을 주었다. 이것은 참여정부 초기의 경제적 어려움을 타파하는 데도 그대로 재탕되어서 세제 혜택을 받는 다주택자가 많이 늘었다. * 2015년 7월 [[그리스]]의 제3차 구제금융 시 한국의 IMF 사태와 비교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세한 것은 [[그리스 경제위기]] 참조. * 관련된 루머로 [[통일교]]가 자신들을 인정해주는 대가로 부채를 모두 갚아주겠다고 했느니, [[대만]]이 [[중국]]과 단교하고 다시 자기네들과 수교하는 조건으로 부채를 모두 갚아주겠다고 했느니 하는 말들이 떠돌고 있지만 모두 사실 무근이다. [[통일그룹]]과 [[대만]] 둘 다 자기 발등에 불 떨어진 상황이어서 그럴 처지도 못 되었다. * 베스트셀러인 '[[화폐전쟁]](Currency Wars)'의 저자 쑹훙빙은 1997년 대한민국의 외환위기가 국제 유대 자본의 음모라고 주장했다. 국제 유대 자본이 저리 대출을 늘려 한국의 자산버블을 키웠다가 [[버블]]이 최고조에 이르자 갑자기 대출금을 회수하여 한국을 사실상 파산시킨 다음에 한국의 알짜 자산들을 걍 헐값으로 먹었다는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양털 깎기(음모론)|양털 깎기]] 문서를 참조할 것. *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치를 경기장을 건설해야 하는데 자금이 부족했기 때문에 영국의 스포츠 도박업체 타이거 풀스 사가 한국 내 사업 허가를 조건으로 자금지원을 하겠다고 나선 적도 있다. 특히 이 일에 적극 나선 이벤트 사업가 송재빈의 수완으로 타이거 풀스 한국 지사가 설립됐으며 나중에 시작된 정부의 체육복권사업인 [[토토]]의 지분도 사들여 영향을 미쳤다는 후문. 하지만 [[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5281.html|모종의 사건]]으로 현재 송재빈의 지분은 사라진 상태다. * 당시 재정경제원 차관이었던 [[강만수]]가 10년 뒤 이명박 정부의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기용되자 IMF사태에 대한 책임이 있다며 비난하는 목소리가 있었는데 애초에 김영삼 정부 시기 재정부 장차관은 계속 경질되며 바뀌던 상황이었고, 강만수는 단지 차관이 된지 얼마 안 된 상황에서 IMF사태가 터진 경우라서 그에게 책임을 지라 비판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 전임들이 만들어 돌리던 폭탄이 강만수가 차관이 되며 터진 격이기 때문이다. * 김영삼 대통령이 자금 흐름의 투명성을 높일 목적으로 실시한 정책인 [[금융실명제]]를 폐지시키려 한 세력들이 김영삼의 임기 말에 슬그머니 정부 관련부처 및 언론 내 인맥을 동원해 금융실명제 폐지 필요성 및 가능성을 시사하는 내용을 내보내 군불을 지피는 한편 + IMF 외환 위기의 원인이라고까지 억지를 쓰기도 하였다. 금융실명제가 실시되면서 일부 부자들이 자산을 해외로 빼돌리는 일도 있었지만 금융실명제 실시로 인한 혼란은 불과 2 ~ 3일 만에 빠르게 수습되었다. 무엇보다 금융실명제의 시행취지(자금흐름 투명성 제고)와 외환 위기를 연관시키려 하는 일 자체가 터무니없는 수준의 무리수다. 오히려 금융실명제 시행으로 자금세탁을 막았고 탈세가 근절되었기 때문에, 시행 안했으면 당시 한국 경제는 더 큰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더구나 IMF의 성향상 경제의 투명성 제고를 높이는 방향을 원하지 반대로 간다는것은 말이 안된다. * 1997년 정부가 IMF측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후 정확히 18년째인 2015년 11월 22일 공교롭게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사망했다. * 흔히 [[국제통화기금|IMF]] 혹은 IMF 사태 라고 많이 이야기하는데 사실 IMF는 '''구제금융을 해 준 기관인 것이지 외환위기의 원인은 아니다.''' 정확히는 1997년 외환 위기가 맞다. 이런 관계로 사람들이 이 사태를 항상 IMF 사태라고 부르며 IMF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어 IMF 관계자들은 "우리는 한국 경제를 구제해 준 기관인데 왜 IMF를 나쁜 것처럼 말하느냐?"면서 싫어한다고 한다. 허나 상술했듯 현대 한국의 미래에 막대한 악영향을 미치는 행위[* 대표적인 경우는 기존 12% 정도의 금리를 '''약 27%대로 올리도록 강요한 것'''. 애초에 말만 구제 기관이지, 사채업자랑 똑같다.]들을 강요한 게 바로 IMF고 이는 IMF 자신도 시인한 사실이라 IMF의 미셸 캉드쉬 총재와 아시아태평양 국장 휴버트 나이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IMF가 한국인들과 한국 정부에게 산 원한이 어느 정도였냐면 2021년 공매도에 관련해 한국 정부에 "개인 투자자 보호는 물론 모든 시장 참여자들이 균등한 장에서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지만, 공매도에 대한 전면적 금지를 통해 균등의 장을 확보하는 것은 굉장히 날카롭지 않은 도구로서 대응하는 것" 이라는 등의 몇 가지 '조언'을 했지만 한국 정부 인사가[* 기획재정부의 고위급 인사였다고 한다.] IMF라는 말을 듣자마자 안색이 변해서는 "[[https://www.segye.com/newsView/20210128520635?OutUrl=daum|어디서 내정간섭이냐!]]"고 소리쳤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 IMF 측에서는 그냥 조언 한 마디 했다가 욕을 먹었으니 억울하겠지만 한 번 심하게 당해 본 한국 측에서는 IMF의 의도를 당연히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데다 저 조언이 나온 타이밍 자체도 안 좋았던 것이, 저 말이 나왔던 시기가 [[게임스탑 주가 폭등 사건]]으로 공매도 가지고 장난치며 자기들 배만 채우는 헤지펀드 등의 공매도 세력의 민낯이 다 드러나면서 공매도에 대한 인식이 시궁창이 되었을 때였다. 이 영 좋지 않았던 타이밍 + 안 그래도 한국인들이 IMF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부정적인 인식이 겹쳐지면서 "저거 설마 게임스탑 건으로 손해보게 생겼으니까 한국을 뜯어내려고 [[월가]] 공매도 세력 놈들이 IMF랑 뒤에서 짠 거 아냐?" 라는 [[음모론]]적인 시선으로 보는 이들도 일부 있었을 정도. * 경제가 이렇게 안 좋아지자 대학교 재학생들은 경제난을 피하는 방책으로 '에라이 차라리 군대나 가자' 스킬을 대량으로 시전하여 군대 입영자가 엄청나게 늘었다. 일부 부대는 막사를 긴급히 지어 올리는 등 군대는 한동안 병력 적체에 시달려야 했다. 반면 몇몇 재학생들은 [[한총련]] 등 [[운동권]] 세력에 가담해 'IMF 재협상' 및 '정리해고 저지', '경제청문회 개최' 등을 외쳤지만 국민들로부터 별 호응을 얻어내지 못했다. * 지금도 악명 높은 [[서울역]], [[영등포역]]의 [[노숙자]]는 이때 폭증했다고 해도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도시공간 형성 특성상 이전에도 있었지만 1998~2001년 사이에는 서울역앞 광장은 물론 시청 앞으로 나오는 지하도까지 노숙자가 가득했다. 심지어 [[자살]]까지 하는 경우도 많았다. * 2013년 한종해 기자가 일요시사에 연재한 <망해도 잘사는 부자들>에 따르면 IMF 사태로 망한 재벌들 중 아직도 부를 누리거나 다른 사업에 손댄 이들도 있다고 한다. 당장 해외로 도피한 한보그룹의 [[정태수]]나 대우그룹의 [[김우중]], 쌍용그룹의 [[김석원(기업인)|김석원]], 동아그룹의 [[최원석(기업인)|최원석]], [[신동아그룹]]의 [[최순영(기업인)|최순영]]이 그런 케이스.[* 하지만 이들이 실제로 부를 누려가며 살아간 게 맞는지는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다. 정태수는 생사 여부를 공식적으로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철저하게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해 오다 사망한 것으로 보이고 최원석은 동아예대 정도를 빼면 대부분의 재산을 잃었기 때문이다.] * 외환위기 당시 망할 뻔했지만 극적으로 살아난 재벌들이 여럿 있는데, [[크라운해태그룹]], [[한라그룹]], [[벽산그룹]] 등이 그런 케이스다. 크라운제과는 2004년에 해태제과를 인수하면서 화려하게 재기해 ‘크라운해태그룹’으로 발돋움했고 한라그룹은 규모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현대중공업, KCC그룹 같은 친척 회사들의 지원으로 다시 살아났다. 벽산그룹 역시 1998년에 워크아웃을 맞고 채권단 관리를 받다가 2002년에 기존 오너집안이 되찾아왔다. * 당시 많은 기업들이 부도가 났는데 직종 불문하고 부도 사실을 재빨리 알리지 않아 시민들이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 백화점 같은 경우 관계자 말에 의하면 많은 시민들이 백화점을 찾아 일에 혼선을 줄 것을 우려했다고 한다. 그 예로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 나오는 갑수는 [[미도파]]가 갑자기 문을 닫아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 IMF 외환위기 시대를 뚜렷하게 기억하는 마지막 세대는 사태가 제일 심각했던 1997년 말~1998년 사이에 유치원 및 초등학교에 재학한 1990~1991년, 1992~1994년생이다.[* 1998년 기준으로 1990년~1991년생은 초등학교에 재학 중이었고 1992년~1994년생은 유치원에 다녔다.] 이들은 나라 안팎으로 심각했던 시절을 뚜렷하게 기억할 것이며 외환위기로 인해 집안 경제가 어려워져 점점 험악해지는[* 잦은 부부싸움, 집세를 내지 못해 거리로 내몰리는 현실 등] 자신의 가정환경 속에서 불안하게 살았을 것이다. 이런 상황으로 자신의 어린 시절은 큰 트라우마로 남았을 것이고 다시는 떠오르기도 싫은 불행한 시기로 1990년대 후반을 평가할 것이다.[* 이에 따라 90년대와 2000년대 둘 다 초등학교에 다닌 1990~1991년생은 초등학교 시절 중에서 1990년대에 대한 언급은 일절 안하고 2000년 이후에 대한 언급만 중점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 일각에서는 이때 [[모라토리움]]을 도구로 IMF의 협상 조건을 더 완화시켰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대표적으로 제임스 크로티 미국 메사추세츠대 교수나 김창근 교수 등의 주장.[[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8414.html|#]]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어차피 대부분 민간부채라 정부에서 모라토리움을 선언할 것도 없이, 조건이 좋지않아 받지않고 시장에 맡겨놓겠다는 태도를 좀더 유지했으면 협상조건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본다. 실제로 당시 기업들의 구조조정을 맡은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는 [[모라토리움]]을 검토하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이를 주장하기도 했다고 하지만 당시 국민의 정부에서 이미 가닥을 잡은 상태라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https://www.viewsnnews.com/article?q=88015|#]] 이에 대해 당시 경제부총리였던 [[임창열]]은 석유 한방울도 안 나고 식량이 안 나는 나라라는 점을 지적하며 실제로 모라토리움을 했다면 현재까지도 경제상태가 좋지 않았을 것이라고 반박했다.[[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54240|#]] * [[피치(신용평가회사)|Fitch]]에서 국가 신용등급이 6단계가 하향된 경우로는 1997년 외환위기 당시의 한국을 제외하면 한동안 없었다. 그러나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미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 일부 국가를 제외한 상당수의 국가에서 동참 중으로 서방권을 포함한 [[제1세계]] 국가는 물론이고 스위스 등의 중립국인 [[제3세계]] 국가들도 동참했다.]에서 러시아와 협력국[* 러시아를 도운 벨라루스도 SWIFT 결제망에서 제외되는 등 예외없이 미국의 제재를 받고 있다.]을 상대로 경제제재가 발동되어 이 영향으로 러시아의 국가 신용등급이 대폭 하향되었다. 피치 외에 신용평가회사인 S&P와 무디스도 러시아의 신용등급을 대폭 하락시키고 있는 상황이라서 2022년 3월 6일 기준 무디스가 러시아의 국가 신용등급을 무려 10단계나 하향시켰는데 이 10단계 하향은 1997년 외환 위기 당시의 한국보다 더 크게 하락했다. 자세한 내용은 [[2022년 대러시아 경제제재]] 참고. * 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IMF 구제 금융을 졸업한 것은 2001년 8월 23일이었다. 그러나 IMF 이후 구조조정이 상례화되어 이후에도 명예퇴직, 신입사원 채용 축소는 계속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태백, 삼팔선, 사오정, 오륙도와 같은 단어를 IMF 외환위기 시절의 단어로 기억하지만 IMF 졸업 후 2년이 지난 2003년에 등장한 신조어였다.[[https://www.joongang.co.kr/article/281049#home|#]]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